조총(鳥銃)을 받아드린 오다 노부나가는 도쿄에서 매우 형식적이지만 통일정권을 세우는 기초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다 1582년 부하 아케치 미쯔히데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그의 세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가게 된다. 근거지를 도쿄에서 오사카로 옮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고마기야마 전투
야인들에게 효과적이었던 금비책이 16세기 중반이후에 왜구들에게는 소용없는 방책이 되고 말았다. 4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일본은 1550년경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스페인 총인 아퀴버스(Arquebus)를 들여오게 되고 그 우월성이 무너지는 순간 치세는 끝이나고 7년간의 조일전쟁으로 접어들게 된다.
동향이라든가 왜구에 의한 피해상을 몸소 느꼈다. 화약을 개발해 왜구를 물리치겠다고 생각한 최무선은 자신의 노복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1373년 마침내 화약 개발에 성공한다.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6 전술과 전략 그리고 전쟁 베일을 벗다』, 효형출판사, 2003. pp.178~179.
조선의 武器所持禁止令에 대하여 조사하려고 하였었다. 칼의 나라로 유명한 일본의 경우도 무기의 사용을 억압하였으며,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선비의 나라인 조선은 어땠을까? 도덕성 강조를 위해서라도 무기소지를 애초에 금지하지 않았을까? 처음엔 그런 생각으로 무기 소지 금지령에 관련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일본군에는 최신식의 무기인 조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행주대첩에 대해 살펴보면 임진왜란 3대 대첩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일본군 3만 명 대 조선군 2천 3백 명으로서 적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로 싸워 이겼던 전투이
전쟁으로써 조선시대의 다양한 무기들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다.
3대 대첩이란?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도 대첩
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행주대첩: 임진왜란 때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싸움
한산도대첩 : 조선수군이 일본수군
전쟁이 발생할 경우에 전혀 유용성이 없는 전법이었다.
국방태세에 대해서 알아보면, 당시의 국방책임자들은 일본의 침략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전에서 미리 적의 상륙을 저지하겠다는 기본적인 계책조차 갖지 못한 실정에 놓여 있었다. 조선수군의 존재이유는 일본의 침략으로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는 사냥감인 동물에게만 사용했던 무기를 자신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인간들에게도 사용했다. 마침내 인류가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떼를 지어 싸워서 이긴 자들은 토지와 재산을 빼앗고, 패배한 자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것을 반복하면서 각지에는 소국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일본군에 대항하던 전투는 오전5시부터 시작되어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일본군은 서울로 철수했다. 권율의 행주대첩이 있을 후 2월15일 이여송은 평양으로 돌아왔다. 류성룡은 조선왕조 대대로 왕릉이 있는 곳인 경기도의 회복이 절실하였기에 이여송에게 다시한번 진군을 청하였으나 이여송은 이
조선이 전란을 겪지 않았다는 주장들이 많아지고 있다. 지리적인 우위를 다분히 지니고 있는 우리나라는 역대 유목 민족들의 침략을 많이 받아왔다. 그러한 어지러운 대외정세 속에서 광해군이 선택한 외교정책은 인조정권의 후금정책에 비해 실용적이었고 그 결과 전쟁도 피할 수 있었다고 평가되었